우리 삶에는 데스티니(destiny)가 있다. 에베소서 1장 1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해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명확한 설계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 우리 삶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연의 산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넘치는 계획이다. p.34
그분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계획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대이며 사랑이다. 우리 인생에는 데스티니가 있다. 그리고 이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지혜와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디자인하신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p.34
인생에는 설계도가 있다. 창조주가 디자인하신 설계도가 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누가 이 설계도에 더 가까운 인생을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인생은 그림의 화려함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로 평가되어진다. p.35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이 주신 데스티니에서 멀어진 인생은 무엇을 해도 목마르다. p.38
우리는 질적인 모험과 양적인 모험을 구별해야 한다.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사람은 ‘가치 세계’에 살고 있다. 그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이 충동, 그에게 늘 활력을 주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바로 가치의 세계, 질적인 세계를 체험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 열망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늘 질적인 면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양적인 데서 보충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험이 이렇게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바뀌면 비극적인 악순환에 빠져 버린다. 양이란 항상 더 비싼 선물, 더 많은 봉급 같은 무엇인가 더 바랄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돈이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양으로 계산되는 것이므로, 돈을 모험의 재료로 삼는 사람은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실망하게 된다. p.25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기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펴 줄 자극제, 즉 새로운 활력소를 찾고 있다. 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무엇인가에 열중한다. 그러나 이들이 여러 가지를 추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의 효율성은 오히려 크게 떨어진다.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대의명분을 이루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의명분을 이루는 데 방해를 받는다. p.42
영적인 생활은 계속되는 새로운 탄생으로만 이루어진다. 사람의 가슴이 산발적으로나마 계속해서 뛰려면 다시금 알을 깨고 나오는 체험, 새로운 선지자, 새로운 모험이 있어야만 한다. p.67
성령은 우리에게 늘 뒤가 아닌 앞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한 것이 1963년에 세계 교회 협의회 회장단이 발표한 성령 강림절 담화문이다. “향수는 우리 교회들에게 유혹거리다. 이 병은 주후 1세기나 12세기, 16세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물론 우리는 초대교회를 지배했던 진한 형제애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교회 시대와는 달리 새로운 형태를 띠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다른 시대에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우리에게 현실적인 모험은 우리 시대의 모험이다. pp.69-70
며칠 전 내 생애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험은 발코니에서 팔마 항구를 굽어보며 이 책의 처음 몇 쪽을 썼을 때 시작되었다. 지금은 펜이 처음보다 쉽게 굴러간다. 나는 이미 시작된 모험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뛰어들기 전에 마음속으로 모험이라는 주제에 온갖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은 첫 줄을 어떻게 써 나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들끓었다. 이것이 책으로 낼 만한 주제인가?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할 것인가? 보잘것없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너무 역설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이 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담대히 자신을 모험에 바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을 던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많은 단어로 내 생각을 늘어놓음으로써 이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마음대로 중단하지 못한다. pp.71-73
내가 첫 번째 책을 낼 때, 나는 원고를 친구 여섯 명에게 보여 주었고, 그들은 수고스럽게도 베른에 모여서 꼬박 하루 동안 나와 함께 원고에 대해 논의했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그것을 출판하라고 권하지 않았고, 한 명이 첫 장을 기고 형식으로 의학 잡지에 보내 반응을 살펴보라고 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모험에 책임져 주리라고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그것은 당신의 모험이지 그들의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모험은 극히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개인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조언은 당신 자신의 태도에 크게 좌우된다. 당신의 결심이 굳으면 찬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당신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면 일을 추진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p.81
나의 첫 번째 책은 3년 전 훨씬 심각한 망설임 끝에 내린 대담한 결정의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건강, 질병, 치유의 분야에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담당하는 역할을 연구하는 분야로 평생의 연구 방향을 바꾸겠다는 결정이었다. 이 때도 친구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아내는 나를 안심시켜 내게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 때 이후로 이 일은 ‘나의’ 모험이 아닌 ‘우리의’ 모험이었다. 남편과 아내가 같은 모험을 체험하는 결혼 생활은 행복할 것이다. 이것이 두 사람의 유대를 얼마나 강화하는지 모른다. 3년 후에 나는 그간의 경험 일부를 글로 옮겼고, 탈고한 뒤에 출판사 세 곳을 찾아갔다. 바로 이 부분에서 모험이 진짜로 시작된 것이다. 서재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모험은 현실에서 드러나야 한다. p.83
아마추어는 무엇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이다. 아마추어의 매력이자 장점은 그저 좋아서 하는 것에 있다. 아마추어가 하는 일은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가운데 하나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선의 ‘전문가’인 두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에 앞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들은 직업상의 의무에만 마음이 바빠 상처 입은 사람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발길을 멈추고 아마추어 의사, 아마추어 간호사, 아마추어 구급차 대원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목회자들이 불타는 확신 가운데 사역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직업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들은 일종의 아마추어 사역자인 단순한 복음 전도자의 열렬한 헌신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사랑과 전적인 헌신의 정신이 목회자나 의사를 직업과 관련된 틀에 박힌 일상의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그의 마음속에 모험의 불꽃을 다시 당겨 준다. pp.93-94
결혼 역시 진실함에 대한 커다란 모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인간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부부가 거짓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숨기는 순간,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모험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서로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기로 용기를 내는 순간, 이들의 결혼 생활은 다시 한 번 놀라운 모험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혼자 있으면 사람은 곧 모험의 정신을 잃고 화석화된다. 오래지 않아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솔직하고 열린 대화 속에서 자신을 알아 가게 된다. 그래서 결혼은 모험을 계속 새롭게 하는 더없이 훌륭한 도구가 된다. pp 110-111